(경제 #4) 일본의 버블 경제 시절, 이후 총정리(부동산 등)

[일본의 버블 경제 형성 과정]

일본 경제를 버블로 이끈 원인으로 1985년 9월에 있었던 플라자 합의와 1987년 2월 루브르 합의를 들 수 있습니다. 플라자 합의는 환율 변동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루브르 합의는 금리 변동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극적으로 보여준 중요한 분기점이었습니다.

 

□ 미국의 쌍둥이 적자

1970년대는 인플레이션의 시대였습니다. 198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폴 볼커'라는 인물이 미 연준 의장에 임명되었고, 폴 볼커는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인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경기둔화를 감수해서라도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하겠다는 것이 당시 폴 볼커 FED 의장의 의지였습니다.

 

미국 FED 기준금리는 20% 가까이까지 인상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많은 기업들이 무너졌고 실업 문제도 심했습니다. 경기가 망가지고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고 위축된 수요는 결국 물가를 하락시켰습니다. 이렇게 인플레이션과 고유가가 잡히기 시작했고 물가 역시 안정됩니다.

 

물가는 안정되었지만 경기는 여전히 좋지 않았고, 당시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적극적인 감세안과 FED 역시 기준금리를 인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경기부양책으로 1980년대 미국 경기는 어느 정도 개선되는 기미가 보였지만 재정지출을 늘리다보니 재정적자가 심해졌고, 더불어 당시 달러화의 강세와 일본 및 서독의 부상으로 미국의 수출 제조업이 무너지면서 무역적자 역시 심해졌습니다. 재정적자와 무역적자가 함께 심각해지는 쌍둥이 적자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깐율>
고물가를 잡기 위한 기준금리 인상으로 경기 침체 발생, 경기 침체 해결을 위한 재정지출 및 기준금리 인하 등으로 재정적자 상황 발생, 그리고 국외 상황에 의한 수출 제조업의 무너짐으로 무역적자가 발생했던 과거 1970 ~ 1980년대 미국 상황을 보며 각국의 적절한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정책, 정부의 재정 정책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플라자 합의

미국은 쌍둥이 적자 심화 원인 중 하나로 서독과 일본의 대미 무역흑자가 언급되며 이슈가 되고, '너희가 미국에 수출을 많이 하는 바람에 미국의 무역적자도 심화되었고 미국 내 제조업 경기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1985년 9월 G5 정상회담에서 '플라자 합의'를 통해 일본 엔화의 가치를 절상토록 합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자국 통화 가치가 두 배로 절상되어 수출품의 가격경쟁력이 크게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고 미국의 무역적자 증가를 제어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깐율>
대미 수출에서 무역 흑자를 기록하고 있던 일본에게 엔화 가치 절상을 유도한 '플라자 합의'. 이를 통해 엔화가 초강세를 보이며 일본은 수출 경쟁력에서 밀리게 되고, 당시 한국이 기록적인 수출 성장을 이루며 득을 보게 되었습니다.

 

 루브르 합의

미국 입장에서는 플라자 합의를 통해 추가적인 무역적자를 제어하였고, 누적 무역적자를 줄이고자 1987년 '루브르 합의'를 통해 일본과 서독에게 내수를 키워달라고 요구하게 됩니다.

 

루브르 합의 이후 일본은 당시 일본의 기준금리를 인하했고, 내수부양을 위한 각종 대책을 도입하게 됩니다. 당시 부동산 경기부양 역시 그중 하나였고 집 사기 좋은 환경이 펼쳐지기에 이릅니다. 일본은 금리도 낮아지고 엔화 절상으로 인해 수입품의 가격도 저렴해졌습니다. 거기에 1980년대 중후반의 국제유가는 1970년대와 달리 큰 폭으로 하락해 있었습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유가 하락은 당연히 구매력의 향상을 뜻하며, 부동산담보대출 등이 완화되었으니 부동산 쪽으로 자금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1980년대 후반 일본의 부동산 버블은 극에 달했고 이른바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게 됩니다. 일본의 소비 시장 역시 상당히 과열되었습니다. 내수가 커지게 된 것입니다. 일본이 내수 버블에 힘입어 미국의 물건을 마구 사주니 오랜 기간 쌓여왔던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도 1980년대 후반으로 가면서 크게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플라자 합의를 통한 환율 조정과 루브르 합의를 통한 금리 인하 및 내수부양, 이 두 가지 사건으로 불균형이 해결되었습니다.

<깐율>
미국의 입장에서는 플라자 합의와 루브르 합의를 통해 성공적으로 무역적자를 줄일 수 있는 이벤트였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두 가지 합의를 이행하는 과정에서 거대한 경제 버블이 형성되게 됩니다. 일본의 정부, 중앙은행은 도대체 뭘 하고 있었을까 생각듭니다.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와 교훈]

□ 일본 버블 경제의 붕괴

1989년 일본 자산 시장의 버블은 거의 정점해 달했습니다. 니케이225 지수는 당시 40,000포인트 수준에 육박하면서 기록적인 상승세를 나타냈습니다. 버블이 워낙 심해진 만큼 물가가 오르기 시작하자 일본 중앙은행은 매우 빠른 속도로 당시 오랜 기간 동안 동결을 유지하던 기준금리를 빠르게 인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대출 금리도 빠르게 치솟기 시작하였고 대출자들의 이자 부담이 매우 커졌습니다.

 

집값이 계속해서 오를 것이라는 기대가 컸던 당시 일본의 가정들은 주택담보대출을 최대한 끼고 주택을 매입한 상태였지만 주택 가격은 큰 폭으로 하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주택 가격이 하락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도한 부채 역시 문제입니다. LTV가 120%에 달했던 만큼 집값의 하락으로 대출만 남게 되었고 결국 채무 불이행, 디폴트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디폴트 선언은 결국 일본 은행들의 부담으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개인들도 자산 가격보다 부채가 훨씬 더 큰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부채 부담에 일본 내 소비도 극도로 줄어드는 현상으로 이어집니다. 소비 수요가 없어진다는 얘기는 곧 물건 가격이 하락한다는 것이고, 경제 여러 전반의 제품가가 이렇게 하락함에 따라 디플레이션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경제 주체들은 향후 자산 가격이나 물가가 계속해서 하락할 것이라는 심리를 갖게 됩니다. 향후 물가가 하락할 거란 기대감이 커지면 최대한 소비를 뒤로 늦추게 되고 디플레이션의 만성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런 디플레이션의 만성화가 일본 경제 장기 침체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소비 위축 뿐만 아니라 은행들의 부실 대출 역시 상당한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은행들의 부실이 심각하면 정부나 중앙은행에서 지원해줄 필요가 있지만 일본 당국은 은행의 부실 대출을 처리하는 것보다는 부동산 경기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은행이 부실로 인해 자금 중개라는 순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돈을 정말 필요로 하는 곳에 돈이 가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져 이를 급선무로 해결해야 하지만 일본 당국에서는 이를 미루어두고 부동산 경기 부양에 상당한 재정을 낭비해버린 것입니다. 

 

 일본 버블 경제 붕괴의 교훈

1990년대 초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면서 불거진 은행의 문제를 1997년이 되어서야 해결하겠다고 나서게 됩니다. 버블 붕괴도 문제였지만 붕괴 이후에 일본 당국이 수차례 실수가 문제를 키운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1987년 버블의 징후가 짙게 드리워질 때 자산 버블 가능성을 사전 차단하는 데 실패(블랙먼데이 사건 등)

2) 1989 ~ 1990년 버블을 제어하기 위해 너무 빠르고 강한 금리 인상을 단행

3) 버블 붕괴로 자산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는 국면에서 적극적인 자산 가격 안정화 대책을 내놓지 못함

4) 정부는 금융 기관의 부실이라는 핵심 보다는 부동산 경기부양 등에 몰두

<깐율>
부동산 등 일본의 자산 시장이 과열되어 있었지만, 버블이 과하게 생성될 때까지 이를 억제하지 못하여 위기가 찾아오자 급격하게 무너져 잃어버린 사반세기를 겪게 되었습니다. 적정선에서 벗어나려는 징조가 보이면 이를 위한 적절한 조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버블 경제 붕괴 이후]

 고베 대지진, 역플라자 합의

1995년 1월 고베에 진도 7.2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일본의 정부를 비롯해 손해보험사들 역시 상당한 금액의 보험금을 지급해줘야 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의 버블 붕괴 이후 금리를 워낙 낮은 수준으로 유지했었기 때문에 일본의 보험사들은 해외로 투자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고베 대지진이 일어나고 보험금을 지급을 위해 해외 투자 자산을 매각합니다. 매각 후 달러화를 엔화로 전환하기 위해 엔화를 사들였고, 고베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95년 1 ~ 4월 사이 일본 엔화 가치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상승하게 됩니다.

 

일본은 버블 붕괴 등으로 내수 성장도 쉽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엔화가 초강세를 보임에 따라 내수와 수출 모두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일본은 1995년 4월 G7 정상회담에서 경제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통제할 수 없는 자연재해로 슈퍼 엔고가 찾아와 엎친 데 덮친 격이 되었으니 엔화 약세를 만들 수 있도록 G7 국가들이 용인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G7 국가들은 이런 상황을 감안하여 엔화 약세 유도에 동의를 해주게 됩니다. 엔화 강세를  강제했었던 플라자 합의와는 정반대인 정책 결정, 1995년 4월의 이 합의를 '역플라자 합의'라고 합니다. 역플라자 합의 이후 초강세를 보이던 엔화 가치는 빠르게 약세로 전환됐습니다. 

<깐율>
일본은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강세를 이어 왔으나 고베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인해 1995년 엔화 약세를 위한 역플라자 합의를 이루어 냈습니다. 이는 이전까지 엔화 강세로 한국 기업들이 수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의 상황을 만들어냈고, 1997년 외환위기와 맞물려 많은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과 무제한 양적완화

2011년 3월의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또다시 일본의 금융 기관들, 특히 보험사들은 보험금 지급을 위해 해외의 자산을 매각하면서 본국으로 자금을 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엔화는 강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달러-엔화 환율이 하락하는 슈퍼 엔고를 또 한 차례 만들어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일본 경제가 여전히 고전하던 상황에서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일본의 내수가 어려운데다 엔화 초강세가 동반됨에 따라 수출 성장 역시 어려워졌다는 데 있었습니다. 2012년 하반기 아베 신조가 총리로 임명되고 아베 신조는 아베노믹스라는 과감한 경기부양책을 도입합니다. 아베는 일본 중앙은행으로 하여금 일본 장기 국채를 매입하도록 무제한 양적완화 프로그램을 도입하고 엔화를 찍어내어 일본 장기 국채를 사들입니다. 일본 중앙은행은 엔화를 찍고, 그렇게 찍은 엔화를 금융 시장에 주고, 그 대가로 일본 국채를 사들인 것입니다. 시중에는 엔화 공급이 늘어나 엔화 공급 증가는 엔화 가치의 하락, 즉 엔화 약세로 이어집니다.

 

엔화 공급을 늘리면 엔화의 가치는 하락하여 일본의 수입 물가를 높이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고, 수입 물가의 상승은 근본적으로 일본의 물가 상승에 상당히 기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은 디플레이션, 즉 물가가 하락하는 상황을 뒤집기 위해 무제한 양적완화를 진행, 엔화의 공급을 늘렸던 것입니다.

 

양적완화 정책에 힘입어 일본 수출 대기업들이 기사회생하자 일본 경제에도 화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일본의 대표 주가 지수인 니케이225 지수 역시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기업들의 상황이 상당 수준 개선되었고 일본 경제가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난 듯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깐율>
양적완화를 통한 엔화 약세는 자국의 수출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기 떄문에 국제사회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지만, 버블 붕괴 이후부터 이어져온 장기 불황과 동일본 대지진이라는 자연재해로 일본은 슈퍼엔고 상황에서 또 다시 엔화 약세를 위한 명분을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이 성장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수출 경쟁국인 일본의 엔화 초강세가 재현되자 한국 수출 기업들은 다시 한 번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자동차, 화학, 정유 기업들을 중심으로 큰 폭으로 상승했습니다.

 

 

※ 위 내용은 오건영 저자님의 [앞으로 3년 경제전쟁의 미래] 책을 읽고 내용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습니다. 다음 편에서도 더 좋은 내용을 공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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